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문세 노래를 듣다 문득 어릴 때 주말마다 챙겨보던 TV 명화 프로그램이 생각났고, 그냥 틀어놓을 생각으로 재생한 영화가 102분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2006년 작 미스 리틀 선샤인, 가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불편하면서도 따뜻하게 쓰인 영화는 오랜만이었습니다.

입소문으로만 살아남은 영화의 배경
가족영화라고 하면 흔히 눈물 쥐어짜기와 억지 감동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영화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그 선입견이 꽤 부끄러워지더군요. 미스 리틀 선샤인은 마케팅 파워나 대형 배우의 후광이 아니라 순전히 작품성으로 관객을 끌어모은 드문 사례입니다. 미국 개봉 당시 상영 4주차에 153개 극장에서 691개 극장으로 상영관 수가 급격히 늘었고, 5주차에는 주말 박스오피스 3위까지 올라섰습니다. 이른바 입소문 마케팅(Word-of-Mouth Marketing)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여기서 입소문 마케팅이란 광고비 없이 관객이 자발적으로 주변에 영화를 추천하면서 흥행이 확산되는 방식으로,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담보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전략입니다.
반면 국내 개봉 당시 관객 수는 26,000명에 그쳤습니다. 천만 영화가 연간 몇 편씩 쏟아지는 한국 시장 기준으로는 처참한 수치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도 극장이 아니라 EBS 세계의 명화 편성표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지상파에서 주말의 명화가 사라진 자리를 EBS가 간신히 지키고 있다는 게,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씁쓸했습니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빛을 받지 못한 건 단순히 홍보 부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 관객이 가족영화에 기대하는 공식, 즉 눈물과 화해의 클라이맥스가 이 영화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담담하고 건조한 유머, 그리고 마지막에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는 여운이 있습니다. 익숙함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고, 저도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캐릭터 앙상블이 만드는 서사 구조
일반적으로 가족영화는 중심 갈등(Central Conflict), 즉 가족 구성원 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다가 공통의 사건을 계기로 화해에 이르는 구조를 따릅니다. 여기서 중심 갈등이란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 긴장 요소로, 관객이 영화 내내 해소를 기다리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도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시작 오프닝만 봐도 결말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공식을 따르면서도 각 캐릭터의 결함을 그냥 방치해 두기 때문입니다. 성공학 강사 아버지 리처드는 매사를 승자와 패자로 나누지만 정작 자신의 출판 계약은 실패로 끝납니다. 게이 삼촌 프랭크는 자기 분야 미국 1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자살 시도 후 누나 집에 얹혀 삽니다. 할아버지는 헤로인을 복용하다 요양원에서 쫓겨난 노인이고, 아들 드웨인은 9개월째 묵언수행(沈黙行)으로 가족과 대화를 거부합니다. 묵언수행이란 특정 목표를 이룰 때까지 말을 하지 않겠다는 자발적 침묵을 의미하는데, 드웨인의 경우 공군사관학교 진학이라는 꿈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이 가족의 여정은 막내딸 올리브가 지역 어린이 미인 대회 본선인 미스 리틀 선샤인 캘리포니아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뉴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 레돈도 비치까지, 비행기도 아닌 낡은 황색 폭스바겐 승합차에 여섯 가족이 올라탑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이 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클러치가 망가져 경사진 곳에서 밀어야 시동이 걸리는 이 차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장난 이 가족의 메타포(Metaphor)로 읽혔습니다. 메타포란 어떤 대상을 다른 개념에 빗대어 그 본질을 전달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영화는 이 장치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줍니다. 그 절제가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핵심 캐릭터별 결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버지 리처드: 성공을 강의하지만 본인은 연속 실패 중
- 어머니 쉐릴: 가족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중심이지만 늘 지쳐 있음
- 삼촌 프랭크: 자살 시도 후 무기력하게 얹혀살며 사회 복귀를 고민 중
- 할아버지: 마약 복용, 거친 언행, 그러나 손녀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
- 아들 드웨인: 9개월 묵언수행, 공군의 꿈이 색맹으로 무너짐
- 딸 올리브: 미인 대회와는 거리가 먼 외모지만 가장 순수한 꿈을 품고 있음
가족이라는 공식을 비트는 방식
저도 처음엔 결말이 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교묘하게 비틉니다. 올리브가 본선 무대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어린이 미인 대회(Child Beauty Pageant)의 통념과 완전히 반대 방향입니다. 어린이 미인 대회란 아이들의 외모, 의상, 퍼포먼스를 겨루는 대회로,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지나친 성인화와 상업화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https://www.apa.org)). 올리브의 무대는 그 관행에 대한 일종의 풍자로도 읽힙니다.
할아버지가 죽는 장면도 의외로 담담하게 처리됩니다. 슬프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죽음조차 이 가족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건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가족이 할아버지 시신을 병원 밖으로 몰래 빼내는 장면은 황당하면서도 웃기고, 그 웃음 뒤에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저도 왜 눈물이 났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영화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를 통해 각 인물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겪는 내면의 성장이나 변화를 의미하는 서사 용어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크는 아버지 리처드와 아들 드웨인입니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던 아버지가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색맹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던 드웨인이 삼촌의 한마디에 다시 차에 오릅니다. "고통의 시간도 지나고 나면, 나중에 그 시절을 사랑한다"는 프랭크 삼촌의 말은 대사 치고는 꽤 긴 울림을 남겼습니다.
영화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Rotten Tomatoes) 기준 이 영화의 평론가 지지율은 91%에 달합니다([출처: Rotten Tomatoes](https://www.rottentomatoes.com)). 박스오피스 수치나 국내 관객 수와 전혀 다른 평가입니다. 영화의 흥행 성적과 작품성이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이 영화는 꽤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블록버스터 액션에 지쳐 있을 때, 혹은 가족과의 관계가 어딘가 어긋난 것 같을 때 이 영화가 생각날 것입니다. 102분이 끝나고 낡은 승합차를 함께 밀며 출발하는 여섯 가족의 뒷모습을 보면,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남습니다. 가족이란 결국 가장 불편하고 가장 엉망이면서도, 끝까지 밀어주는 사람들 아닐까요. 오늘 밤 볼 영화를 고민 중이라면 미스 리틀 선샤인을 권해드립니다.